그 길만의 고유한 온도와 아날로그의 역사를 압축한 첫 문장
국방부가 자리 잡은 지 아홉 해 만에, 그 앞 골목에 대구탕집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조선시대부터 이씨 집성촌으로 알려졌던 동편마을이 반세기 만에 택지 단지로, 그리고 카페거리로 변모했다. 이 골목의 지명처럼, 이 자리
북촌한옥마을이 주거지에서 관광지로 바뀌어 온 변화 자체가 이 골목의 정체성이 되었다
서울을 지은 화강암이 나온 채석장 자리에, 이제 사람들이 옷감을 자르고 바느질한다. 흙에서 나온 것과 손으로 만든 것 사이의 긴 전환
도봉산 등산로 입구, 첫차를 타고 온 이들의 발걸음이 닿기도 전에 가마솥에는 이미 김이 오른다. 1970년대부터 산을 오르기 시작한
을지로는 전국에서 가장 큰 인쇄 골목이었다. 밤을 새고 일한 인쇄공들이 교대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노가리와 생맥주로 회포를 풀었다
강풀의 순정만화 속 배경이 성내동 골목의 벽면으로 물질화했다. 2013년 시작된 도시재생 사업은 낙후된 주택가를 만화 거리로 만들었고
한강신도시 개발이 남긴 것은 아파트만이 아니었다. 상업과 문화를 담은 수변 운하, 야간이 되면 조명과 음악분수로 변신하는 거리. 베네
일산의 주택가는 길 하나를 경계로 둘로 나뉜다. 한쪽은 수십 년을 고이 자리를 지키는 원주민 마을이고, 다른 한쪽은 지난 십 년을 우
조선 도성의 문이 섰던 자리에서, 백 년이 지나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엔 동쪽 끝 광희문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은 골목 전체가 하
광장시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시장이다. 의도는 공동체였고, 결과는 생존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백 년을 이어온 일은 먹는 것뿐이다.
머물 곳이 없던 사람들이 남산 아래 언덕에 모여 동네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 지금은 다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산다. 해방촌은 처음부터
관광객이 늘수록 주민의 밤은 깊어졌다. 2006년 도시예술 프로젝트로 시작된 벽화마을이 십 년 뒤, 주민들 손으로 벽화를 지우던 일이
익선동 한옥은 땅값에 밀려 좁아진 게 아니다. 서민이 살 수 있는 크기로 규격을 정해 지은 집이다. 그 집이 백 년 뒤 지금은 사는
2003년 일산에 처음 선 스트리트형 쇼핑몰은 거리를 상품화하는 법을 보여줬다. 23년이 지난 지금, 이 골목에 남아 있는 것은 수평
조선 초기부터 미술을 담아온 거리가, 일제강점기에는 골동품 상점의 무덤이 되었고, 1980년대에는 화방과 공예점의 요람이 되었다. 그
1884년 러시아공사관이 들어섰던 자리에서 시작된 이 골목은, 구한말 외교의 중심지에서 근대 종교·교육의 요람으로 변모했다. 덕수궁
망원정은 높은 곳에서 먼 경치를 내려다보려고 지었던 정자였다. 오백 년이 지난 지금, 이 동네의 매력은 그 먼 경치가 아니라 가장 가
청계천에서 밀려난 철공소들이 왔고, 홍대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이 들어왔다. 이 골목의 두 번의 도착은 같은 이유에서 비롯했다. 싼 자리
명동은 500년을 한 자리에서 살아온 동네가 아니다. 조선부터 일제를 거쳐 해방, 고도 성장, 글로벌 시대까지 시대마다 몸을 바꾼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과 프로방스마을은 한 걸음 차이로 닿아 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시간대를 품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만들어진
팔판길은 여덟 명의 판서가 살던 곳이었다. 그들이 매일 밟아 닦은 길이 지금은 관광객의 오르막이 되었다. 권력이 떠난 자리에서 문화가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 좁은 골목에는 왜 그림과 시를 쓰는 사람들이 모였을까. 서촌은 권력 가까운 자리에서 권력과는 다른 것을 그리던
1981년 서울프랑스학교가 내려왔을 때 서래마을은 아직 프랑스인의 마을이 아니었다. 그저 강남 부자들이 모여드는 한 동네였다.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