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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작2026.09

퇴근하는 사람들이 만든 골목

을지로는 전국에서 가장 큰 인쇄 골목이었다. 밤을 새고 일한 인쇄공들이 교대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노가리와 생맥주로 회포를 풀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골목이 지금도 그 시간대에 산다.

alleymag.
발행
2026.09.08
골목
을지로 노가리골목
퇴근하는 사람들이 만든 골목
사진 srgmj
SCENE 01 : 낮의 을지로
▲ 2026.08 / 사진 srgmj · https://blog.naver.com/srgmj/224374962947 만선호프 루프탑 야외광장의 테이블과 간판입니다. 작성자: srgmj

사진 한 장에도 이 골목의 낮과 밤이 함께 담기는 경우가 있다. 그림자의 방향, 셔터의 색, 그것만으로도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골목이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 지금 같은 모습이 된 것은 산업의 필요에서 비롯됐다. 을지로는 인쇄의 중심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큰 인쇄 골목이다. 모든 책이, 유인물이, 신문이 이곳에서 나왔다. 납기를 맞추려면 밤을 새야 했다.

밤에도 꺼지지 않는 불빛이 이 동네의 첫인상이었다. 낮과 다를 것 없이 환한 인쇄소 창문, 그 안에서 쉼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그림자. 을지로를 지나던 이들은 이 불 꺼지지 않는 풍경을 당연하게 여겼다.

인쇄 기계는 밤에도 돈다. 옆 사람이 언제 일어나는지 모르는 교대 근무 시스템이었다. 어떤 사람은 밤 열두 시에 들어와서 새벽 여덟 시까지 기계를 맡고, 그 사람이 나가면 다시 다음 사람이 들어온다. 그렇게 사람이 교대되고 기계는 멈추지 않는다. 을지로는 서울의 여러 동네를 거느린 거대한 산업 시설이었다.

기계가 도는 동안에는 대화도 소음에 묻힌다. 손짓과 눈짓으로 지시를 주고받는 일이 흔했다. 시끄러움 속에서 손발을 맞추는 법을 익힌 사람들이 이 골목의 산업을 지탱했다.

을지로의 인쇄소들이 다루던 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전국의 모든 책이, 신문이, 광고 전단이 이곳을 거쳐 나갔다. 어린이 교과서에서부터 문학지, 작은 지방 신문까지. 을지로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문화 유통 자체가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인쇄기 앞에 서 있던 손에는 늘 잉크 냄새가 배어 있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 기계가 돌아가는 진동, 밤새 눈이 시린 형광등 불빛 아래서 사람들은 몇 시간이고 같은 자세로 일했다. 그렇게 일한 하루의 무게는 퇴근길에서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일이 끝난 뒤의 시간

이 시간의 무게를 가장 잘 아는 것은 결국 몸이다. 밤새 서서 일한 다리, 뻐근한 어깨, 그 모든 것이 퇴근이라는 말 속에 함께 담겨 있었다.

한 사람의 퇴근은 다음 사람의 출근을 의미했다. 밤을 새운 인쇄공들은 아침 햇빛이 나올 때 일을 마쳤다. 그들이 할 일은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즉시 가지는 않았다. 맥주 한 잔과 노가리가 필요했다. 밤새 몸에 밴 기름냄새와 기계음을 씻어내려면, 찬 맥주와 바삭한 안주가 필요했다.

교대 시간이 되면 좁은 골목 어귀에서 두 무리가 스친다. 이제 막 일을 마친 사람들과 이제 막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들. 서로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짧게 안부를 묻기도 한다. 그 짧은 스침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던 골목이었다.

이천구백팔십 년 십일 월 을지 오비 베어가 노가리를 안주로 생맥주를 팔기 시작했다. 그 가게가 이 골목의 시작이었다. 남들이 이 조합을 따라했다. 생맥주는 비싸지 않았고, 노가리는 더 싸고 소화도 빨랐다.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다. 그것이 퇴근하는 사람들의 밥상이 되었다.

생맥주 한 잔의 값이 부담스럽지 않았다는 것, 노가리 한 마리가 금방 나온다는 것. 이 두 가지 조건이 밤새 일한 사람들의 주머니 사정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비싼 안주를 오래 기다릴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노가리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 선택이 쌓여 지금의 골목을 만들었다.

SCENE 02 : 저녁이 되는 골목
▲ 서울 중구 을지로3가 · 2026.07 / 사진 thddbsk174 · kirara1974 · https://blog.naver.com/thddbsk174/224351409044 / https://blog.naver.com/kirara1974/224333079594 루프탑 야장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과, 불이 켜진 실내 포차의 왁자한 풍경입니다. 퇴근한 사람들이 해 지자마자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자리를 채운다고 여러 블로거가 적었습니다.

골목이 된 필요

필요에서 시작된 골목은 계획으로 만들어진 골목과 다르게 자란다. 누군가 큰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의 수요가 가게를 하나씩 불러들였다. 그 자연스러운 확장이 지금의 밀도를 만들었다.

처음엔 한 가게였다. 그 다음 가게가 옆에 생겼다. 또 다른 가게가 그 옆에 생겼다. 모두 같은 것을 했다. 생맥주와 노가리. 그것이 업종이 되었다. 더 이상 누가 처음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 골목 자체가 노가리 골목이 되었다.

한 가게가 잘된다는 소문이 나면 옆 가게도 같은 것을 팔기 시작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다만 이 골목에서는 그 확산이 유난히 자연스러웠다. 손님들이 이미 노가리와 생맥주를 찾아 이곳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 문을 여는 가게로서는 굳이 다른 메뉴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골목이 생기면 사람이 모인다. 퇴근하는 인쇄공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지역의 다른 직장인들도 왔다. 가게가 늘어나면서 메뉴도 다양해졌다. 노가리와 치킨, 골뱅이, 먹태. 간단한 것들이었지만, 맥주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저녁이 가까워지면 골목 여기저기서 의자를 꺼내는 소리가 들린다. 접이식 테이블이 펼쳐지고, 파라솔이 세워지고, 메뉴판이 벽에 걸린다. 몇 시간 전까지 셔터가 내려져 있던 자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풍경이 바뀐다. 이 변신은 매일 반복되지만 볼 때마다 낯설게 느껴진다.

지금 이 골목은 그 시간대에 가장 활기찬 곳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야외 테이블이 한꺼번에 펼쳐진다. 사람들이 모이고, 네온사인이 켜진다. 그것이 이 골목의 본래 목적이다. 일이 끝난 사람들의 휴식.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지금도 그 역할을 한다.

저녁이 오기 전까지 이 골목은 낮의 을지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몇 시간 만에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된다. 이 급격한 전환을 매일 지켜본 사람이라면, 을지로가 하루에 두 번 태어나는 동네라고 말할 만하다.

SCENE 03 : 야장의 풍경
▲ 서울 중구 을지로3가 · 2026.05 / 사진 younging_320 · https://blog.naver.com/younging_320/224291789068 천막 지붕 아래 평상 자리마다 사람이 가득 찼습니다. 벽에 걸린 TV로 야구 중계를 보며 잔을 부딪치는 모습이, 을지로 야장의 흔한 저녁 풍경이라고 블로거는 적었습니다.

야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사이로 사진을 찍는 손도 많다. 오래된 간판과 지금 이 순간의 활기를 한 장에 담으려는 손길이다. 이 골목이 사진으로 자주 남는 이유는, 그만큼 이 순간이 붙잡아 둘 만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이천십오 년에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단순한 먹거리 골목이 아니라, 서울의 문화유산이 되었다는 뜻이다. 산업의 필요에서 비롯된 이 골목이, 결국 도시의 추억이 되었다.

미래유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이 골목이 박제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저녁마다 의자가 나오고, 여전히 노가리가 구워지고, 여전히 잔이 부딪힌다. 지정된 것은 이름표일 뿐, 골목의 하루는 그 이름표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인쇄 기계는 더 이상 그렇게 돌지 않는다. 밤을 새우는 인쇄공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 골목은 여전히 그 시간대에 산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여기로 온다. 이제는 인쇄공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퇴근이 이 골목의 대상이 된다. 술꾼의 골목이 아니라, 퇴근하는 사람들의 골목이 되었다.

인쇄공이 줄어든 자리를 지금은 다른 얼굴의 퇴근이 채운다. 사무실에서 나온 사람, 공구상을 정리하고 나온 사람, 근처를 지나다 불빛에 이끌린 사람. 누구든 이 골목에 앉으면 결국 같은 몸짓을 한다. 잔을 들고, 노가리를 찢고, 하루를 내려놓는다.

SCENE 04 : 노가리골목의 간판들
▲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129 을지로3가역 3호선 / 사진 공공누리 한국관광공사 · https://korean.visitkorea.or.kr/detail/ms_detail.do?cotid=2994062 왼쪽은 을지로 노가리골목의 터줏대감 만선호프 본점 외관. 오른쪽은 노가리체인본부·명동꼼장어 간판이 늘어선 골목 풍경으로, 아직 손님이 오기 전 야외 테이블과 의자가 미리 세팅돼 있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역사와 성립 과정은 2026-09-08에 확인한 공개 자료에 따른 것이다. 가게의 운영 특성과 방문객의 흐름은 같은 기간의 방문 기록과 보도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을지로중구인쇄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