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온 이름의 길
경리단길에서 이름을 빌려온 골목이 용리단길이다. 백 년 내력을 자랑하는 골목들이 있을 때, 이 길은 아직 만들어지는 중이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9.08
- 골목
- 용리단길



용리단길은 신용산역과 용산역, 삼각지역 사이에 걸쳐 있다. 넓지 않은 골목이고, 가게들도 작은 편이다. 하지만 이 좁은 공간에 가게들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 완성된 골목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는 중이다.
골목을 걸어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다. 간판 하나하나의 색과 글씨체가 다르고, 어떤 곳은 나무를 그대로 드러냈고 어떤 곳은 콘크리트를 노출한 채로 두었다. 통유리창으로 안이 훤히 보이는 가게가 있는가 하면, 문 모양부터 다르게 낸 가게도 있다. 통일된 규칙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 골목의 규칙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질감이 없다. 다른 골목이라면 튀어 보일 조합들이 여기서는 나란히 붙어 있어도 자연스럽게 지나간다.
이름부터 남다르다. '용리단길'이라는 이름은 따로 정해진 게 아니라, 어디선가 빌려온 것이다. 경리단길이라는 유명한 골목이 있고, 그것을 본떠 지은 것이 용리단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패턴을 따라 인스턴트 골목 이름을 만들었지만, 용리단길은 그 중 하나로 정착했다.
이름의 유래
경리단길의 이름은 용산기지에 있던 국군재정관리단의 옛 이름인 육군중앙경리단에서 왔다. 그것이 알려지면서 비슷한 지역들이 같은 형식의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어떤 곳은 이름만 빌려갔고, 어떤 곳은 이름과 함께 경리단길만큼 발전했고, 어떤 곳은 이름만 남았다.
경리단길을 본떠 이름을 지은 골목은 전국 여러 곳에 있었다. 그중 상당수는 이름만 반짝 쓰이다가 조용히 사라졌고, 몇몇은 원래의 이름을 지우고 다른 정체성을 세웠다. 용리단길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빌려온 이름이 반드시 껍데기로만 끝나지는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이름을 빌려온 뒤에 그 안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더 중요했던 셈이다.
용리단길은 그 중간쯤이다. 완전히 성공한 것도 아니고, 이름만 남은 것도 아니다. 계속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새로운 가게가 들어서고, 또 다른 가게가 나간다. 사람들이 발견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부른다.
이 골목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목적지로 정하고 찾아온 게 아니라, 다른 일로 근처를 지나다가 우연히 발을 들였다는 경우가 많다. 걷다가 냄새가 좋아서, 간판이 눈에 띄어서 들어갔다가, 나중에야 이곳이 용리단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식이다. 이름이 나중에 따라붙는 경험이라는 점에서, 이 골목이 만들어지는 방식과 닮아 있다. 정해진 다음 알려지는 게 아니라, 알려진 다음에야 이름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역사 없이 만들어지는 것들
용리단길의 특이한 점은 역사를 말할 게 없다는 것이다. 다른 골목들은 어딘가에서 시작했고, 그 시작점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용리단길은 빌려온 이름처럼, 만들어진 형태도 없다. 시작이 명확하지 않다.
보통 오래된 골목을 걸을 때는 무언가를 배우는 기분이 든다. 이 담이 왜 이렇게 낮은지, 이 길이 왜 이렇게 굽었는지 궁금해지고, 답을 찾으면 그 골목이 더 입체적으로 보인다. 용리단길에는 그런 질문이 잘 생기지 않는다. 대신 지금 이 순간의 냄새와 소리, 눈앞의 간판에만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된다. 배우는 골목이 아니라 느끼는 골목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부족함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 골목만이 가진 리듬으로 읽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것이 용리단길만의 특징이자 자유도다. 옛 형태를 지킬 필요가 없고, 원래의 목적을 유지할 필요도 없다. 단지 지금 필요한 것들만 들어선다. 사람들이 찾는 음식, 사람들이 원하는 분위기. 그것만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용리단길은 실험적이다. 우동 가게도 있고, 파스타 전문점도 있고, 곰탕을 파는 곳도 있다. 전통적인 순서나 맥락 없이, 그냥 들어설 수 있는 것들이 들어선다.
실제로 골목을 걷다 보면 몇 걸음 사이에 공기가 바뀐다. 국물 냄새가 나던 자리에서 몇 걸음 옮기면 버터 냄새가 나고, 또 몇 걸음 가면 커피 냄새가 난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수렴하지 않고 냄새와 소리가 계속 교차한다. 이런 뒤섞임이 낯설게 느껴질 법도 한데, 걷는 사람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음 골목이 궁금해지는 이유가 된다. 정해진 순서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어도 지루할 틈이 없는 구조다.


아직도 진행형
용리단길은 완성된 골목이 아니다. 아마 완성될 수도 없을 것 같다. 완성된다는 것은 역사가 정해진다는 뜻인데, 이 골목은 역사가 없이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신 현재가 계속 만들어진다.
한 번 다녀온 사람이 얼마 뒤 다시 찾아도 골목의 얼굴은 조금 달라져 있을 때가 많다. 없던 가게가 새로 생기고, 있던 가게의 간판이 바뀌어 있다. 방문 기록들을 이어서 보면 그 변화의 속도가 느껴진다. 어제 왔던 사람이 오늘 다시 와도 새로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골목이 아직 진행형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완성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아쉬울 수 있지만, 변화 자체를 구경하는 사람에게는 이보다 좋은 조건이 없다.
낮과 저녁의 골목도 서로 다른 표정을 짓는다. 낮에는 골목 전체가 환하게 열려 있어 걷는 속도가 자연스럽게 빨라지고, 저녁이 되면 가게마다 다른 색의 조명이 켜지면서 걷는 속도가 오히려 느려진다. 같은 길인데도 시간에 따라 완전히 다른 골목을 걷는 기분이 든다. 이 역시 역사가 아니라 지금이 만드는 인상이다.
용리단길이 만드는 것은 지금의 감각이다. 옛 시간을 유지할 필요도 없고,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냥 지금 누군가가 걷고, 누군가가 들어서고, 누군가가 떠나간다. 그 과정이 이 골목의 역사가 되고, 그것의 반복이 이 골목을 살게 한다.
용리단길은 빌려온 이름의 길이지만, 만드는 과정은 계속되고 있다. 경리단길이 아니라 용리단길이 되는 과정을 지금도 보고 있다. 누군가가 새로운 가게를 열고, 또 누군가가 찾아오는 과정 속에서.
이것이 이 골목의 가장 특이한 점이다. 완성되지 않은 채로, 계속 살아있다. 옛것을 지킬 필요도 없고, 새것을 강요할 필요도 없다. 그저 지금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받아들인다.
용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빌려온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이것을 증명한다. 원래의 의미나 역사를 따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단지 형식만 빌려왔을 뿐, 내용은 온전히 새롭게 채워지고 있다. 그것이 이 길을 특별하게 만든다.
이 골목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도 제각각이다. 혼자 조용히 한 끼를 해결하러 오는 사람이 있고, 여럿이 모여 저녁 내내 자리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데이트를 하러 오는 사람,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 그냥 산책하다 들어온 사람까지 섞인다. 골목이 하나의 얼굴을 갖지 않듯, 그 골목을 찾는 사람들도 하나의 얼굴을 갖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