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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이 있던 자리에 집이 들어선 동네

연희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이궁 연희궁에서 비롯됐다. 궁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주택들이 들어섰다. 지금 이 골목에는 그 집들 사이에 가게가 조용히 들어와 있다.

alleymag.
발행
2026.09.08
골목
연희동
궁이 있던 자리에 집이 들어선 동네
사진 ilovesua82
SCENE 01 : 골목에 남은 집들의 흔적
▲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11가길 30 · 2026.09 / 사진 newjzero · https://blog.naver.com/newjzero/224401802060 팰리스 투 하우스의 외관과 입구. 건물의 벽돌 외벽과 세련된 간판이 연희동의 감성과 잘 어울린다.

연희동을 걸으면 이 골목이 주거지라는 것을 먼저 느낀다. 시장이 아니다. 관광지도 아니다. 사람들의 집이 있는 곳이다. 그것이 이 골목을 가장 먼저 설명하는 문장이다.

연희동의 골목은 큰길에서 한 발짝만 들어와도 소리가 잦아든다. 차 소리도, 사람 소리도 한 겹 걸러진 듯 조용해진다. 그 조용함이 이 동네를 주거지답게 만드는 첫 번째 조건이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담장이다. 낮은 담장 너머로 마당의 나무가 고개를 내밀고, 창문 너머로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누군가의 생활이 바로 눈앞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감각이 이 골목을 걷는 내내 따라온다.

연희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자리에 집이 있기 전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 이 자리에는 궁이 있었다. 연희궁이라 불렸던 이궁 가운데 하나다. 왕이 거처하지 않는 궁이 이궁이다. 연희궁은 그렇게 이 자리에서 왕의 두 번째 처소 역할을 했다.

궁이 있던 땅

연희궁은 지금 연세대학교 자리로 추정된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이 동네를 움직이는 이름 속에 그 흔적이 있다. 궁이 없어도 궁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정자동, 염동, 궁동, 음월리라고 불리던 이곳이 후대에 연희정이라 불리게 되었다. 궁의 이름이 동네 이름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름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자리에 있었던 무언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이 동네를 걷는 사람들 가운데 궁의 존재를 의식하는 이는 많지 않겠지만,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궁이라는 글자가 붙은 동네 이름들은 서울 곳곳에 남아 있다. 그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을 것이다. 연희동은 그 가운데서도 궁의 자취가 이름에만 남고 실제 터는 다른 용도로 완전히 바뀐 사례에 속한다.

일제강점기에 이 지역은 연희정으로 그 이름을 남겼다가, 이천구백사십육 년에 연희동으로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된다. 궁이 사라진 뒤 백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이 더 이상 궁이 아니라 동네가 되었을 때의 이름이다. 궁동에서 연희동으로, 동네는 이름을 새로 짓는 방식으로 변했다.

이름이 바뀌는 사이에도 이 땅의 지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낮은 언덕과 완만한 경사가 이어지는 지형은 궁이 있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비슷했을 것이다. 다만 그 위를 채우는 것이 달라졌을 뿐이다.

SCENE 02 : 주택지의 높이
▲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 2026.08 / 사진 jhbluesss · https://blog.naver.com/jhbluesss/224379260372 연희동 골목의 경사진 지형. 높이가 다른 건물들이 만드는 단계적 풍경이 이 동네의 지리를 보여준다.

집이 들어선 골목

땅을 고르고 도로를 내는 작업이 한창이던 시절의 사진들을 보면, 지금의 골목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담겨 있다. 흙바닥 위로 전봇대가 세워지고, 아직 나무 하나 심기지 않은 마당들이 줄지어 있다. 그 황량한 풍경이 지금의 나무 우거진 골목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새로 뚫린 도로 옆으로 집이 들어서던 그 시절, 이곳으로 이사 온 사람들은 저마다 새로운 삶의 자리를 마련한다는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집들의 담장이 낡고 나무가 크게 자랐지만, 처음 이사 오던 날의 설렘 같은 것이 골목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만 같다.

이천구백육십팔 년 연희로와 증가로가 뚫린다. 도로가 생기면서 사람이 들어온다. 도시가 빠르게 자라고 있던 시기였다. 서울은 팽창하고 있었고, 모든 곳에 집이 필요했다. 연희동도 그렇게 주택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평지에는 고급 주택이 들어섰고, 높은 곳에는 시민아파트가 지어졌다. 성산로와 연희로 주변에는 상가가 생겼다. 궁의 자리를 사람들의 집이 차지했다. 집이 들어서는 속도에 맞춰 골목도 생겼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 골목이 되었다.

주택이 들어서는 순서에도 나름의 층위가 있었다. 좋은 자리부터 먼저 채워지고, 그다음 자리들이 차례로 메워졌다. 지금 골목을 걸으며 만나는 크고 작은 집들의 배치에는 그 당시의 순서가 어렴풋이 남아 있다.

이 동네에 화교가 많이 살면서 중국집이 들어섰다. 궁 다음에 올 것은 주택이었고, 주택 옆에 올 것은 가게였다. 그 순서대로 연희동은 자란다. 지금도 그 순서는 유지되고 있다.

중국집의 냄새가 골목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면, 그 냄새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된 간판을 단 가게일수록 그 냄새가 더 진하게 느껴진다. 냄새 하나로 세월을 가늠하게 되는 골목이다.

SCENE 03 : 주택가 속의 상점
▲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 2026.09 / 사진 newjzero · https://blog.naver.com/newjzero/224401802060 주택지 담벼락 옆의 작은 문. 주택과 가게가 경계 없이 섞여 있는 연희동의 특징. 궁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서민의 삶이 이 풍경에 담긴다.

지금의 연희동을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고즈넉함이다. 시장의 북적거림이 없다. 골목은 주택지다. 하지만 그 주택지 안에 가게가 조용히 들어와 있다. 카페, 소품샵, 식당들이다. 그들은 주택지의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거기 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손님들 대부분이 목소리를 낮춘다. 딱히 정해진 규칙은 아니지만, 조용한 동네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그런 습관을 만든 것 같다. 소란스러운 대화보다는 낮은 대화, 큰 웃음보다는 옅은 미소가 이 골목의 카페 안 풍경이다.

이것이 연희동의 변화다. 궁에서 주택으로, 주택 가운데 가게로. 각 단계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그 자리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는다. 여전히 누군가의 생활 공간이고, 누군가가 매일 발 디디는 골목이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

연희동이라는 이름이 궁을 의미했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지금 이 이름이 가리키는 것은 궁도 아니고, 거기 있던 주택들만도 아니다. 그 주택들 사이사이에 생겨난 가게들과 골목과 사람들이 모두 포함된 어떤 동네다.

이름은 변한다. 하지만 뜻은 남는다. 궁의 자취는 골목에, 주택지의 자취는 골목의 높낮이에, 사람들의 자취는 문을 낸 각각의 가게들에 남아 있다. 연희동을 걸으며 느끼는 것은 그 모든 층이 한 번에 만나는 감각이다.

연희동을 몇 번이고 다시 찾는 사람들은 매번 새로운 골목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지도에 다 담기지 않는 작은 샛길들, 담장 사이로 슬쩍 보이는 정원들이 그렇다. 궁이 있던 땅의 넓이를 지금은 가늠할 수 없지만, 그 자리를 채운 골목들의 밀도만큼은 걸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진다.

골목 하나를 걷다가 방향을 잘못 들어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어차피 이 동네는 큰길 몇 개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서, 어느 골목으로 빠지든 다시 익숙한 길로 돌아 나올 수 있다. 그 안전한 미로 같은 구조가 오히려 마음 편히 헤매도 좋은 산책을 만들어 준다.

궁이 있던 자리라는 사실을 알고 걸으면 골목이 다르게 보인다는 사람들이 있다. 몰랐을 때는 그냥 조용한 동네였는데, 알고 나니 이 땅 위에 겹겹이 쌓인 시간이 상상된다는 것이다. 이름 하나가 골목을 보는 눈을 바꿔놓는 셈이다.

연희동의 역사와 지명 변화는 2026-09-08에 확인한 공개 자료에 따른 것이다. 동네의 현재 구성과 가게들의 위치는 같은 기간 방문 기록과 블로그 기사에서 반복해 나타난 서술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연희동서대문구주택지